50대 아줌마의 고백-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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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조영신 올해 57살. 1958년생 개띠 아줌마입니다. 결혼 31년차의 평범한 가정의 주부로 두 딸은 이미 결혼을 시켜 손주도 셋이나 본 할머니예요.
남편은 뭐하냐구요? 남편은 얼마전 대학교 교수직에서 정년퇴직하고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있답니다. 아내는 안중에 없어서 시골 전원주택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입니다. 한달에 집에 오는 날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고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희는 일반 중산층보다는 잘사는 수준인거 같아요. 남편은 대학교수로 퇴직했지 두 딸은 재력있는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갔으니 먹고사는 것을 넘어 경제적으로는 풍족한 생활을 해왔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그 이를 만나기 이전까지는요. 딸애들 교육에 신경쓰느라 저의 개인적인 삶은 포기를 했었고 딸애들을 다 대학에 보내고 나니 어느덧 제 나이는 40대 후반이었습니다. 결혼하고 노는 것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보수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어영부영하다보니 50대가 되었고 하나씩 하나씩 찾아오는 갱년기 증상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엘리트였습니다. 서울의 명문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고 33년전에 뉴욕으로 유학을 갔었으니까요. 뉴욕에서 유학중이던 남폄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 커리어우먼의 꿈은 접어야 했지만요. 결혼과 함께 제 꿈은 모두 반납하고 오로지 가족을 위한 삶만 살아와야 했습니다.
제 인생에 후회가 밀려오고 공허한 마음이 생긴건 둘째까지 시집보낸 53세때 였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80평 큰 집에 혼자 남겨진 제 자신이 유난히 그날따라 쓸쓸해보였습니다.
‘가진 것도 많고 풍족하게 살았는데 왜 이렇게 허전하고 허무한거야’
그날 이후로 그런 좋지 않은 감정은 저를 계속해서 괴롭혔습니다. 하나씩 갱년기 증상들도 찾아오기까지 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대학 동창이자 미국 유학생활을 같이 했던 친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SNS로 30여년만에 근황을 알게 된 친구였어요. 프로필 사진만 봐도 저와 다르게 세련되 보이더라구요. 연예인 아줌마 처럼 세련되고 매력있어 보였습니다. 하긴 그 친구도 무용을 전공하고 유학가서 미국에 정착한 친구니 그 끼를 숨기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쪽지로 연락이 오고가면서 한번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습니다. 마침 조만간 한국에 나올 계획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한달이 채 되지 않아서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이름은 미숙이었는데 영어 이름은 자넷이라고 꽤 세련된 이름을 쓰더라구요. 저도 또래에 비해서는 관리를 잘 받은 편이라 젊게보인다고 자부하는데 미숙이는 50대의 나이가 무색하게 잘 꾸민만큼 몸매도 탱탱했습니다. 운동 꽤나한듯한 탄탄한 엉덩이와 실리콘 좀 넣은것 처럼 보이는 가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남편과 결혼하면서 대학교수의 부인으로 잘 자리잡고 산 것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서 젊은 시절에는 저를 부러워 했다고 하더라구요. 미숙이라는 그 친구는 야망이 있었던 친구라 그때 당시에도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미숙이는 자신의 철학이 뚜렸했고 지금도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럼 계속 싱글로 살아왔냐?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한국 정서로는 잘 이해할 수 없지만 법적인 부부는 아니지만 부부처럼 지내는 관계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신아 결혼이란게 좋아보여도 그게 결국 족쇄인거야. 결혼없이도 얼마나 행복하게 남자 만나고 살수 있다고 남자란게 많이 만나보고 결정해야하는 거고 그 결정도 나중에 지나고 나면 후회하는 경우가 생긴다니까?”
미숙이는 그렇게 결혼 회의론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땐 몰랐지만 50대가 지난 지금 그 의견에 공감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안정된 가정도 중요하지만 여자에게는 개인의 기쁨이 더 중요하다고요.
그럼 미숙이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궁금했습니다. 흔히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라이프 스타일이었습니다. 미숙이는 뉴욕에서 무용단 활동을 30대 초반까지 하고 이후에는 시간강사로 활동을 하면서 인맥을 쌓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40대에 접어들때는 현지인과 합작으로 사설 아카데미를 설립했는데 현지인 인맥이 많은 탓에 연예인들을 배출하는 등용문이 될 정도로 아카데미가 경제적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오로지 남편과 딸들만 바라보고 살았던 제 삶과는 극과 극의 삶이었죠. 그래도 한때 같이 유학하고 꿈을 꾼 친구였는데 말이죠.
미숙이가 들려준 남자 스토리는 더 믿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결혼한 무렵에 미숙이도 같은 학교의 백인과 눈이 맞았습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고 하더라구요. 그 후로 미숙이는 1년이 머다하고 남자를 바꿔탔다고 합니다. 황인,흑인,백인,멕시칸 가릴것 없이 다양하게 만나봤지만 하나같이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황인은 라이프 스타일은 비슷해서 코드는 맞았지만 백인,흑인을 맛본 다음에야 섹스자리가 시원치 않아 결혼상대로는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인,흑인,멕시칸들은 잠자리 궁합만으로 인생을 걸기에는 삶의 패턴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성격적인 부분에서 부딪히는게 많았다고 하네요.
오히려 그렇게 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고 동거생활을 이어간게 나중에는 득이 됐다고 합니다. 30대가 지나고 40대가 되었을때 동년배 남자보다도 자연스럽게 연하남이 끌리게 되었다고 하니까요.
요즘 제가 듣기로 우리나라도 아줌마들이 연하남을 즐겨 찾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미숙이의 남자관계는 제가 알던 상식보다도 훨씬더 쇼킹했습니다. 그때 당시 50대 초반이었던 미숙이가 알려준 남자는 총 네명. 번갈아가면서 만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이라고 했습니다. 세사람이 아카데미에서 수강하는 원생이고 연예인을 꿈꾸는 10대였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한사람은 디렉터였는데 풋볼 선수출신의 20대 후반의 건장한 흑인 남성었습니다.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그 남자들의 사진을 하나씩 보여줬습니다. 10대 소년 중 하나는 곱상하게 생긴 백인이었고 겉으로 보기엔 대학생 같아보였습니다. 나머지 둘은 흑인 댄서였습니다. 그 흑인 디렉터라는 사람이 미숙이의 메인 남친인거 같았습니다. 같은 아파트에서 생활한다고 하더라구요. 같이 지낸지는 6개월쯤 되었는데 50대가 되면서 새로운 욕구를 갈망하고 있는데 잘 채워주는 상대라고 하더라구요. 그러면서 핸드폰으로 보여준 그 남자의 팔뚝만한 자지는 쇼킹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러웠습니다. 다른 차원의 삶을 살고 있는게 느껴졌으니까요.
미숙이는 저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상식에 사로잡혀서 살지마, 어차피 남녀는 섹스를 탐하는 거고 이왕이면 영(Young)한 남자가 좋잖아. 걔들도 우리같이 올드한 여자들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 대화만 되면 쉽게 관계할 수 있어. 주변에 젊은 애들이 있다면 편견 가지지 말고 자연스럽게 친해져봐”
미숙이와의 만남은 보수적이고 무료하게 살던 제 삶에 영향을 줬습니다. 그 날 이후로 보이는 남자들. 특히 젊은 남자들에게 마음을 주고 싶었고 사소한 남자와의 접촉에서부터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택배 배달오는 것부터 묘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래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냥 마음만 가지는 것으로 뭔가 진행되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하늘은 저를 버리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30년 넘게 한남자만 바라보며 성실하게 살았던 것에 대한 보상을 이룰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죠. 때는 미숙이를 만난지 두달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데서 찾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보석같은 일이었습니다.
남편이 재태크로 상가매입을 준비중이었는데 해외출장이 잦은 터라 제가 계약을 도맡아서 했었습니다. 5층짜리 건물로 시가 50억 정도의 건물이었는데 시기가 잘 맞아서 36억에 계약할 수 있었습니다. 그 건물은 까페와 학원이 밀집되어 있는 건물이었죠. 맨 윗층은 독서실이었습니다. 계약 이후에는 하루에 한번은 건물에 들러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보곤 했습니다.
얼마정도 상가 입주자들과 대화를 하다보니 매출이라든지 대략적인 가게 상황들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1층부터 4층까지 까페와 학원들은 나름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5층 독서실이 문제였습니다. 사실 독서실이 사양산업이라 하소연 하는 것은 어디든 마찬가지였죠. 주인은 임대료 때문에 볼맨소리를 하루가 멀다하고 했습니다.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도 갈수록 적어졌고 고정적으로 오는 학생은 대략 하루 저녁에 다섯명 남짓밖에 안됐습니다. 40명 정도 공부할 수 있는 좌석이 마련된 것을 생각하면 심각한 수준이었죠. 저는 빨리 독서실 주인이 처분하고 나가길 바랬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부탁을 해서 며칠동안 데스크를 봐준적이 있습니다. 주간에는 알바가 서고 저녁 6시부터 새벽 1시까지 제가 데스크를 본거였습니다. 오는 사람 체크하고 CCTV로 특이사항이 없는지 체크하는 게 일이었습니다. 수월했죠. 그날부터 어떤아이들이 오는지 파악할 수도 있었고 왜 이 독서실이 장사가 안되는지 파악할 수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지역에 고교가 없어서 고등학생은 전혀 유치하지 못했고 공부와는 별 관계없는 중학생들 너댓명만 오는 것이었습니다. CCTV로 가만히 지켜보니 남학생 셋에 여학생 둘이었는데 대부분 와서 공부를 좀 하다가 엎드려 잤습니다. 밤 9시쯤 되자 이곳이 독서실인지 수면실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죠.
안되겠다 싶어 애들을 깨우러 갔습니다. 간섭하는게 아니라 제대로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면 잠이라도 깨워야 했습니다.
“얘들아 공부하러 왔음 자지말고 공부해야지”
애들이 일어나긴 했습니다. 공부할 의욕은 없어보였습니다. 그런데 나랑 눈이 마주친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날 보더니 다시 잘 생각을 안합니다.
“아줌마가 오늘 대신 온거예요?”
약간은 당돌한 아이였습니다. 신상명세를 보니 이름은 한정민이었고 인근 중학교에 다니는 2학년. 15살입니다.
“응, 내가 이건물 주인인데 며칠 저녁은 내가 보기로 했어. 학생들 공부하러 왔으면 공부해야지…응?”
“네…”